서구 근대의 가치들과 식민주의

서양 근대의 바탕에는 식민주의가 있으며, 근대 자유주의 사상이 발명한 가치들은 식민주의와 충돌하지 않는 한에서만 유효하다. 자유, 평등, 형제애 등은 인간 사이에서만 성립하며, 식민주의 하에서 인간의 자격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다음과 같다.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연안 오리노코 강 하구 근처 무인도에서 스물 하고도 여덟 해 동안 완전히 홀로 살다가 마침내 어떻게 기이하게 해적선에 구출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원주민 프라이데이와 오랜 기간 함께 지냈건만, 로빈슨은 '완전히 홀로'(all alone) 살았다고 진술되고 있다. 이런 식민지 원주민이나 이방인뿐 아니라 여성과 아이도 인간의 범위에서 제외되어 있던 건 물론이다.

조금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일본 식민주의의 경우를 통해 유사한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독도를 포함한 한반도를 식민 통치했던 일본이 지금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건 식민주의의 연장이며, 그밖의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 이 점을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4월 25일, 독도관련 담화문에서 간명하게 논증한 바 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되었던 우리 땅입니다. (...)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이 문제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 지배 동안 점유했으며 아직도 점유하고 있는 식민지들의 모든 유형 무형의 자산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국가들은 아직도 식민 지배의 유산을 원상복구할 의지가 전혀 없다. 전후 독일의 사과와 배상은 얻어냈지만, 그건 승전국의 잔치일 뿐이었다. 정작 승전국 자신은 식민주의를 전 상태로 되돌릴 생각이 전혀 없다. 과연 이런 식민주의의 바탕 위에 성립한 서구 근대의 가치들과 권리들이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는 철저하게 따져보고 걸러내야 한다. 이 점에서 탈-근대는 탈-식민주의를 함축한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서구 근대가 발명한 가치들이 모두 무효라는 뜻은 아니다. 따지고 걸러서 남는 것은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 근대의 가치들이 '누구'과 싸우면서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가치는 항상 뭔가를 건 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험적 가치, 자연적 가치란 없다. 모든 가치는 역사의 자식이다. 그런데 서구 근대는 적어도 정당화 담론에 있어서는 '허구'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 허구의 핵심에 있는 것이 계약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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