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小確幸)' -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小確幸)' - 작지만 확실한 행복
'수고했어 오늘도.' 아홉시가 넘은 시간, 듬성듬성 빈 자리가 보이는 한산한 지하철을 타고 서둘러 집에 돌아온 서른여덟의 회사원 김민재씨는 스스로를 격려했다. 찬 바람에 얼어붙었던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물 샤워도 숨돌릴틈 없이 단 오분만에 끝냈다. 김씨의 마음은 한껏 들떠있다. 일주일에 한번 김씨가 '쉐프'로 변신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요리는 일식 에비가츠동(새우튀김덮밥). 어, 그런데 그가 꺼낸 튀김냄비가 좀 작다. 겨우 손가락 두마디만한 지름의 아기자기한 그릇. 조그만 양초를 태워 조리하는 미니 조리대에 냄비를 올려놓고 식용유를 부으며 본격적인 요리를 시작한다. 새우 크기도 새우젓이나 담가먹을 만큼 작다. 그 작은 새우를 핀셋으로 집어 밀가루 옷을 입히고 계란물을 적신 후 다시 빵가루를 입히고 튀김냄비 속에 넣는다. '치지직~' 소리는 여느 튀김요리와 다를 바 없다. 요리를 한단계 한단계 끝낼때마다 폰카로 사진을 찍는 김씨의 얼굴에 만족스런 엷은 미소가 번진다.
김씨의 취미는 다름아닌 '미니어처 요리'. 먹을 수 있는 진짜 식재료를 쓰지만, 완성된 요리 크기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 밖에 안되는 '세상 귀여운' 요리다. 미니어처 요리사들을 위한 귀여운 조리기구와 미니 그릇들을 파는 인터넷 쇼핑몰도 생겨났다. 김씨는 미니어처 요리 동호회에 가입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요리를 배워볼까 생각 중이다. 상상만해도 행복하다.
뭔가 거대하거나 꽤나 고급스러운 취미가 아니라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확실하게 찾는다는 의미의 '소확행(小確幸)'이 2018년 트렌드 키워드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소확행은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0년대에 발간된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소개한 신조어다. 이후 출간된 수필집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하루키가 여러 작품을 통해 소개한 소확행은 그야말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일상이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퐁퐁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이다.
사실 하루키의 '소확행'은 일본 현대사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엄청난 버블 뒤에 찾아온 20년간의 긴 불황이 드리운 우울함. 성장이 멈춰버리고 점점 늙어가는 사회에서, 일부 '선택받은' 부자들 외에는 물질적 풍요를 통한 행복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수많은 소시민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일상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대도시 속 오래된 구도심 뒷골목에 의자 몇개만 들여놓으면 꽉 찰 것 같은 커피숍과 카레집이 여기저기 생겨난 것도 이때문이다.
일본에 훨씬 앞서 저성장·저출산의 그늘에 빠진 유럽은 이미 1960~70년대부터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일반화됐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변되는 잘 갖춰진 사회복지제도는 특히나 더 소확행의 삶을 보편화시켰다. 밤늦게까지 '달리며' 무리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는 있는 삶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카페의 나라' 프랑스에선 집 근처 오래된 카페에서 갓 내린 진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소확행을 뜻하는 '오캄(au calme)'은 불어로 '조용히'란 뜻이다. 조용하게 삶을 즐기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덴마크·노르웨이말로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휘게(Hygge)'도 이와 비슷하다. 따뜻한 스웨터를 입고 나 홀로 또는 가족·친구들과 함께 장작불 옆에서 차를 마시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말한다. 2016년 영국 콜린스영어사전(Collins English Dictionary)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에서 휘게는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스웨덴어 '라곰(lagom)'은 딱히 정의하기 힘든 단어이지만 '딱 알맞은 양', '적당히', '충분히' 정도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상 속에서 딱 알맞은 정도의 일을 하며 적당한 성취감을 느끼고 충분한 휴식을 하는 삶이라고 할까.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는 저택보다는 투박한 벽난로가 있지만 창가에 조그만 허브 화분을 키우며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삶이다.
1970~80년대생들이라면 학교 다닐때 읽었던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란 수필을 기억할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960년대. 모두가 힘겨웠던 그 시절, 피천득은 작은 일상 속의 행복을 얘기한다.
'나는 잔디를 밟기 좋아한다. 젖은 시새(잘고 고운 모래)를 밟기 좋아한다. 고무창 댄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기를 좋아한다. 아가의 머리칼을 만지기 좋아한다. 새로 나온 나뭇잎을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보드랍고 고운 화롯불 재를 만지기 좋아한다. (중략)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서영이 엄마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중략)아름다운 빛을 사랑한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찬란한 만폭동, 앞을 바라보며 걸음이 급하여지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좋은 단풍을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예전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 주신 색종이 같은 빨간색, 보라, 자주, 초록, 이런 황홀한 색깔을 좋아한다. 나는 우리나라 가을 하늘을 사랑한다. 나는 진주빛 비둘기를 좋아한다. 나는 오래된 가구의 마호가니빛을 좋아한다. 늙어가는 학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좋아한다. 나는 이른 아침 종달새 소리를 좋아하며, 꾀꼬리 소리를 반가워하며, 봄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즐긴다. 갈대에 부는 바람 소리를 좋아하며,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나는 골목을 지나갈 때 발을 멈추고 한참이나 서 있게 하는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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