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kr-fiction_쉘터_13화 박사

in #fiction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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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거대한 터널 안에 둥둥 떠 있는 채로 777은 외로움과 지루함에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온갖 상념에 휩싸인 채 몸살에라도 걸린 듯 무기력한 상태로 공중에 떠 있을 뿐이니 말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단한 욕구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상태다. 답답하고 짜증만 난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같은 자리에 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터널에는 777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둥둥 떠 있는데, 777은 언제부턴가 어떤 사람이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777은 다가오는 사람과 어서 빨리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뭐가 됐든 말을 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말상대가 절실했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어두컴컴한 거대한 공간 속에 떠있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777은 점차 가까워지는, 멀리 보이는 저 사람이 776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랬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한편 다가오는 저 사람이 776일 수 있다면 842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777은 두 팔을 움직여보았다. 너무 힘들다. 하지만 느릿하게 움직이긴 한다.

그래! 그렇다면 842라도 좋다. 복수를 하는 거다. 둘 다 이런 상태라면 전처럼 힘의 차이가 크게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목을 졸라 죽이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말 체감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도 느린 속도로 상대가 가까워지다 보니 777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마저 지겨워졌다. 지쳐버렸다. 그냥 누가 되었든 빨리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777은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더하여 776도 842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체구가 작고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역시 벌거벗은 상태였고 털이 없이 매끈했다.

777은 그렇게 다가오는 남자의 겉모습을 인지하고도 또 아주 오랜 시간을 그대로 공중에 떠 있어야만 했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 777과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게 됐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777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777은 혹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작지만 또렷하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저기........ 여봐요?"

남자는 777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남자는 777의 모습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777은 그 와중에도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777이 다시 말을 꺼냈다.

"저......."
"방에서 왔소? 쉘터말고 그 다음."

남자가 불쑥 입을 열자 777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벌거벗은 두 남자가 공중에 둥둥 떠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777은 대화상대가 생겼다는 기쁨에 얼른 대답을 했다.

"네! 맞아요. 당신도요?"
"맞소. 몇 명이었습니까?"
"열 명이요."
"그렇군."

남자는 잠시 시선을 위로 향하더니 한참 생각을 하는 듯 했다. 777이 다급히 뭐라 다시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남자가 말했다.

"하나- 물어봅시다."
"네? 뭘요?"
“혹시 섹스 했습니까?”

777은 당황한 눈빛으로 “에?” 하고 얼버무렸다.

“섹스를 했냐고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함께 방에 도착한 파트너랑 성관계를 했냐 이 말입니다.”
“저도 뭘 묻는지는 잘 알아요. 그런데 그걸 왜 묻습니까?”
“쉘터에 있지 않았소?”
“네. 쉘터에 있었는데요.”

남자는 대뜸 다시 물었다.

“섹스 했습니까? 아니면 조그만 방에서? 어쨌건 쉘터에 들어온 이후 여자와 관계한 적 있습니까?”

남자는 애가 타는 눈으로 777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777은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꼭 대답해야 하나요?”
“그래주심 감사하겠습니다.”

777은 그 와중에도 조금 수치를 느끼며 답했다.

“없습니다.”
“정말요?”
“네.”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정말입니까? 솔직히 말해야합니다.”

순간 776이 777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이 아려왔다.

“정말입니다. 마음에 두었던 여자는 있었습니다만......”
“제기랄!!!”

갑자기 남자가 버럭 욕지거릴 뱉었다. 777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뭡니까?”

남자는 777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서 마구 말을 쏟아냈다.

“이럴 줄 알았어! 젠장! 제기랄! 탈락이야! 탈락! 끝이야! 역시 그랬어!”
“아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제기랄 놈들! 망할! 오십 번째야! 이제 더 물어볼 것도 없어! 젠장!”
“이봐요!!!”

777이 겨우 조금 큰소리로 남자를 부르자 남자가 그제야 777을 보았다. 777이 재차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우린 탈락이오!”
“아니 그러니까......”
“거참 우린 탈락이라고요. 선택받지 못했단 말입니다.”
“뭐요!?”

선택받지 못했다. 즉 ‘그들’이 인류에게 말했던 그것, 바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임이 틀림없었다. 777도 그런 생각은 했었다. 목걸이가 사라진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선택의 증거일 수도 있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근거로 저렇게 확신하듯 말을 한단 말인가?

777이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남자는 또 777의 말을 무시하더니 눈을 아래도 내리깔았다. 혼자 뭐라 중얼중얼 거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뭐 더 살아서 뭐하나?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몰라....... 조금 아쉽지만.”

답답해 죽을 지경인 777이 목소릴 쥐어짜 소릴 질렀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소리냐고요!”

남자가 777을 힐끔 보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가축화요.”
“네?”
“이건 딱 그 과정과 같소. 가축화란 말이오. 망할 것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남자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777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까딱하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물론 나의 가정에 불과하고 확인할 방법도 없지만 거의 확실해요. 외계에서 왔다며 구원이니 뭐니 떠들어대던 그놈들은 말입니다. 인류, 인간을 가축화하고 있어요. 혹시 가축화의 첫 번째 조건이 뭔 줄 압니까?”
“그게 뭐요?”
“감금된 상태에서 교미를 할 수 있어야 하오.”
“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누가 보건 말건 갇혀있건 어쨌건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야. 돼지는 가축화가 가능하지만 고양이는 불가능하지. 그 차이를 아시겠소?”

777이 되물었다.

“하지만 우린 인간........”

남자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인간? 그게 뭐 대수요? 그렇게 오만하니 속아 넘어갈 수밖에....... 뭐? 멸종되기 아까운 종? 고귀한 종? 다들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겠지. 인간은 위대하니까! 존엄하니까! 말도 안 되는 환상들이었을 뿐이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옵니다. 어차피 가만있었으면 다 뒈져버릴 거 그놈들이 식량이든 연료든 뭐든 쓸 데가 있다는 의미였을 뿐.”

777이 발끈해서 되받아쳤다.

“그건 당신만의 생각일 뿐이오!”

남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거-의 확실하오. 선택이라는 게 그런 거였지. 그놈들은 인간을 지켜보면서 가축으로 삼을만한 인간을 골라낸 거요. 난 이 터널에서 단 한 명도 쉘터에 들어온 이후 섹스를 한 사람을 찾지 못했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또 하나 증거를 대볼까요? 나와 갇혀 있던 놈들 중 개, 돼지처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섹스를 하던 놈들은 한 놈도 여기에 없어. 또 그 짐승 같은 연놈들은 위쪽으로 사라져갔지만, 난 아래로 추락했지.”

남자의 말에 777은 문득 위쪽으로 떠오르던 776과 842가 떠올라 조금 움찔했지만 남자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긴 아주 흔하진 않을 거요. 사실 찾기 힘들지. 인류의 막장이라고 그렇게까지 하는 인간들 말이요. 뭐 마찬가지지. 인류도 수백만 종의 동물 중 고작 몇 종밖에 가축화하지 못했으니까. 그래 어쩌면 수치를 모르는 작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종일지도 모르지. 이봐, 당신도 잘 기억해보라고.”

777은 776도 842도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의 말대로 777이 아래로 떨어져 내릴 때 그들을 위로 솟아올랐다. 허나 776은 다르다. 842에게 강제로 범해진 것이다. 강간을 당한 것이다. 아니, 그딴 건 별로 관계없다는 의미인가? 어쨌거나 성관계를 한 것은 사실이다. 밝은 곳에서 벌거벗은 채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남자의 말이 얼추 일리가 있다 해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사실이었다. 인간을 가축화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 같지 않은 말인가?

777이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한번 들어보시겠소? 쉘터를 만든 건 아마도 좀 더 우수한 종을 선별하기 위한 작업이었을 거요. 우선 쉘터 밖에서부터 선별작업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소. 척박한 환경에서 끝까지 생존하여 쉘터로 들어오는 시도를 하려는 자를 우수한 종자로 보는 겁니다. 질병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는, 장성하고 건강한 사람. 그리고 그 투명한 막 기억합니까?”

777은 처음 쉘터의 문이 열렸을 때 보았던 막을 떠올렸다. 777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희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걸로 다시 한 번 추려내는 거죠. 기준이야 간단해요. 생식능력이었겠지. 돌이켜보시오. 아마 남자는 꽤 나이를 먹은 자들이 있었겠지만 여자는 젊은 여자들이 대다수였을 거요. 다름 아닌 생식능력 때문이지.”

777은 남자의 말에 이번엔 대머리 목사 778과 여대생인 776을 떠올렸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랬던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자가 꽤 있었지만 여자는 대부분 나이가 어렸던 것 같았다. 30대인 793이 나이가 많은 축이었으니 말이다.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다음 쉘터 안에서 본격적으로 선별작업이 시작되는 거요.”

777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제 기억에 쉘터 안에선 별 거 없었던 거 같은데........”

남자는 피식 웃더니 답했다.

“과연 그럴까요? 고전적이지만 제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을 쓴 겁니다. 인간의 본능과 직관을 활용하는 거요. 인간도 동물처럼 여자든 남자든 간에 우월한 종이 짝을 찾게 되어 있는 거니까....... 쉽게 말해 더 강한 남자, 그리고 더 예쁜 여자를 찾는 거요. 쉘터에 뭐 할 게 있던가요?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새하얀 벽만 쳐다보고 있다 보면 관계를 통한 즐거움을 찾게 되어있지. 특히 남녀 간의 관계, 연애감정의 교류가 그 중에서도 최고 아니겠소? 결국 1차 선택이 끝나면 다음은 간단합니다. 교미를 잘하면 되는 거지. 그게 목적이니까.”

777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남자의 말을 듣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남자의 말에 777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마 소행성도 놈들이 보냈을 거요.”
“에? 뭐요?”
“아무리 우리가 그들보다 기술이 뒤쳐지고 미개할지언정, 적어도 우리우주, 태양계 내에서의 물리법칙에 관해선 아주 빠삭한 천체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엄청난 소행성의 궤도를 잘못 계산했을 것 같습니까? 분명 지구를 스쳐지나가는 궤도상에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소행성은 어느 순간 궤도를 이탈해서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 대기권을 통과했단 말입니다! 제기랄! 한마디로 그건 소행성이라기 보단 어떤 목적을 지닌 그러니까 일종의 무기처럼 움직였던 거요.”

남자의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놀란 777이 따지듯 되물었다.

"아니 ‘그들’에게 인류가 필요하다면서요? 가축화니 뭐니 한다면서 그렇게 큰 소행성을 떨어트렸다가 다 죽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랬단 말입니까?"
“흥! 그들이 바보요? 소행성은 알다시피 바다에 떨어졌고 직접적으로 운석 때문에 죽은 사람은 지구 인구의 딱 절반 정도지. 그것도 분명 정확히 계산했을 거야. 거기다 어차피 가축화만 성공하면 숫자야 상관없이 얼마든지 번식시키면 될 일이고, 그들의 수용능력도 한계가 있었을 거요. 참 대단하지 않소? 이들은 인간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제로 인간을 한 곳에 몰아넣고 가둬두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아는 거요. 즉 사람들을 쉘터로 몰아넣은 것이 강제된 구속이 아니라 자발적 피난이 된 셈이지.”

777로선 도무지 빈틈을 찾을 수 없는 남자의 논리에 더 이상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들이 제시한 규칙들이 떠올랐다. 777이 다급히 남자에게 말했다.

“그들이 쉘터에서 인간들 사이에 싸움을 금지한 건 뭐죠? 그야말로 인도적인 처사가 아닐까요? 그들이 이성적이고 평화적이란 증거 아닌가요? 그리고 남자가 강한 것을 증명해야 한다면서 싸움을 막으면 어떡합니까?”

남자는 이번에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물 흐르듯 답했다.

“그야 인간은 잔인하니까! 적당히 하는 법이 없는 게 인간이요. 거기다 쉘터는 크고 사람이 많소. 나중에 방에서처럼 소수라면 모를까 분명 다투게 내버려두면 싸우다 편을 가르게 되고 나중엔 작은 집단을 형성하겠지. 그렇게 되면 이제 집단 간의 싸움이 벌어질 테고 집단은 개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죠. 아마 한쪽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싸울 거요. 그러니 그런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싸워 금방 자멸해버릴까 걱정되었겠지. 알겠소? 그들은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을 인간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겁니다. 아 그리고 대놓고 주먹질하고 싸우지 않아도 누가 강한지는 알 수 있어요. 내가 아까 인간의 본능을 들먹이지 않았소. 아마 그냥 좀 지내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요. 이 남자가 저 남자보다 강하다는 사실쯤은. 그리고 가축화에는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소. 그들이 제시한 규칙을 잘 지키는 지 테스트를 하는 거였겠지. 그들이 주는 밥을 얼마나 잘 처먹는지도 테스트했을 거고.”

777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비록 남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한들 777로선 남자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증거나 논리가 없었다.

777은 그만 고개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의 777을 보며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진실을 알았으니 그나마 낫다고 볼 수 있소."

777이 힘없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럼 그들이 인간을 어디에 쓰려는 거죠?"
“아까도 말했지만, 그야 나도 알 방법이 없소. 식량일지 연료일지 인간을 쓰게 될 그들만이 알 수 있겠지. 내 생각엔 말이오. 이것도 내 추측이긴 하지만, 그들의 기술수준이라면 가축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형태의 인간을 어느 정도 확보하면 나중엔 직접 생산할 게 분명합니다.”
“생산?”
“‘멋진 신세계’란 소설 못 봤습니까? 깡통에서 태어나는 그런 인간 말입니다. 인공적으로 수정 및 발생을 시키는 거죠. 지금이야 자연적인 생식이 완전한 인간을 생산하는데 좋다고 판단했겠지만 그들은 곧 더 빠르고 많은 인간을 만들어낼 방법을 발견할 거란 거요. 사실 인간도 여태 자연선택을 넘어 그런 생명체의 지적설계 영역에 도전해왔으니 말입니다.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이 그것이죠. 물론 인간은 결국 실패한 셈입니다. 거의 목전까지 갔었는데......... 이런 대재앙을 맞았으니 말이오.”

777은 거의 목전까지 갔다며 말꼬리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어쩌면 이 남자가 바로 그런 생명체의 지적설계를 연구하던 과학자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들이라면, 아마 인간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에 도달해 완전한 생명체를 설계하고 만들어낼 수 있을 거요. 그들에게 필요한 그런 생명체 말이오. 이렇게 말하니 그들이 무슨 종교에서 떠드는 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그들은 분명 그렇게 할 겁니다. 가축화는 시작에 불과할 거요.”

777이 큰 한숨을 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레 다시 말을 꺼냈다.

“저 그런데 제가 쉘터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하나 있어요. 목사였는데. 좀 신경질적이었죠. 그러던 그가 사람들과 다투다가 사라져 버렸어요.”
“규칙을 어겨서 쫓겨난 건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전 분명히 봤어요. 사라진 게 아니라 뭐랄까 그 자리에서 처형당한 것에 가까웠어요. 뻥! 소리가 나더니 그냥 아주 작은 조각, 먼지만한 조각으로 분해되어버렸어요. 그럼 그게 사람을 이용하는 거라고 할 수 있나요? 그건 그냥 단순히 없애버리는 것 아닌가요?"

남자가 777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오 그래요? 그건 새로운 사실이오! 그렇게 인간을 분해했다....... 음....... 어쩌면 그러한 분해와 소멸의 과정을 통해서 어떤 모종의 에너지를 얻는 것일 수도 있겠군? 아 다행이야!"

다행이라 말하는 남자의 밝은 표정에 777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가 다행이죠?"
"난 또 이 터널 끝에서 한 사람씩 와그작와그작 머리부터 씹어 먹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식이면 오히려 고통도 없을 테니 다행 아닙니까? 순식간에 뻥! 하면 끝이라는 거 아니오? 하긴 그들은 꽤 진보한 문명을 가진 자들일 가능성이 높으니 그런 야만적인 행동은 안하겠지. 뭐 이것도 인간인 나의 기준이지만 어쨌든 따지고 보면 당신 말이 맞긴 합니다. 그들이 인간을 다루는 건 꽤 신사적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이 동물들에게 지금까지 해온 짓을 생각해보면 말이야. 흐흐......."
"인간이 동물들에게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당신 돼지고기 먹으며 돼지에게 감사한 적 있소?"
"뭐요? 그게 무슨........."
"거보시오. 황당한 질문 같죠? 다들 돼지고기를 먹으며 싸고 쉽게 먹을 수 있게 해준 도축업자, 유통업자들에게 감사했겠지. 돼지는 말입니다. 포유류 중에 가장 탐구력이 강하고 지능이 높은 동물이오. 쾌락과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고 추구하고 피합니다. 그런 돼지를 가축화한 인간은 고작 알량한 미각을 위해 돼지를 생명체가 아닌 그저 식자재 정도로 생각했지. 당신 같은 보통사람은 상상조차 못할 방법으로 학대하고 도살당하는 게 돼지요. 사람들은 말입니다. 공급이 수요를 초월하고 난 뒤부터,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각, 즉 쾌락을 위해 먹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래도 저들이 인간보단 덜 잔인해 보인다는 거요. 지금 가축화에서 퇴출된 우리도 딱히 고통은 느끼지 않고 있지 않소?"
"으음......."
"그리고 내 보기에 이 외계인들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 차원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한마디로 기술 밖의 기술인 거지."

남자는 이번엔 또 '그들'의 기술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기 시작했다. 한참 멍한 표정으로 듣기만 하던 777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쪽을 보고 있죠? 다들 저 터널 끝을 바라보고 떠있던데 아닌가요?”

남자가 문득 어울리지도 않는 익살맞은 표정을 짓더니만 목소리를 작게 하더니 답했다.

“혹시 그들이 알면 날 다시 돌려세울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말할 테니 잘 들으시오. 이건 내가 알아낸 건데 특별히 가르쳐드리지. 해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반대로 돌아서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오. 나도 며칠이나 애썼지. 하지만 안 되는 건 아니야. 먼저 발 끄트머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천천히 발끝을 축으로 천천히 머리 위까지 단계적으로 돌린다고 생각하고 모든 힘을 거기에 쏟아야 하오. 그러다보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몸이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도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요. 일단 돌아서면 한 가지 이점이 생기더군. 이동속도가 거의 정지에 가까워집니다. 뭐 그냥 있어도 느리지만.”
“네?”
“아예 정지는 아니오. 정지에 가까워지는 거요. 그러니까 터널 끝에 닿는 속도를 최대한 늦출 수 있다는 거지. 알다시피 이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배고픔도 못 느끼고 배설도 하지 않고 있소. 어쩌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지도 모르지. 어차피 생사는 종교나 철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문제니까 말이오. 아마도 인간이 살아있어야만 그들의 자원으로써 효용이 있을지도 모르지. 뭐랄까 벌이 애벌레에게 먹일 먹이의 신선도를 유지시키기 위해 죽이지 않고 마취시켜놓듯이 말이오. 어쨌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류 최대의 관심사인 생로병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는데 이런 상태라니........."

남자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그들'과 '그들'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남자는 또 ‘그들’이 마프카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종족이라는 얘기도 했다. 777 전에 마주친 자칭 천문학자가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우연히 듣게 된 이름이라면서 가르쳐줬다는데,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으나 저것만은 자신 있게 얘기했다고 한다. 물론 딱히 증거를 제시하진 않았단다.

777은 내심 이 남자가 바깥세상에서는 뭐가 됐든 학문을 탐구하던 학자 따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였다. 그런 와중에 777은 아주 조금이지만 남자와 더 가까워졌음을 눈치 챘다.

"아- 이대로 계속 있으면 부딪힐지도 모르겠어요."
"걱정 마시오. 내가 몸을 약간만 틀면 방향이 바뀌니까. 시간이 흐르면 당신이 날 스쳐지나가게 되지. 연습하면 당신도 나처럼 할 수 있소. 나는 가설을 세운 뒤, 나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왔지."
"아-"

결국 777은 남자와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이 아니었다. 같은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지만 결과적으로 남자가 777을 목표로 다가왔다고 보는 편이 옳았던 것이다. 이번엔 남자가 777에게 물었다.

"어때? 돌아설 거요?"

777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아니요. 좀 더 생각해보고요."
"그래요. 그야 뭐 돌아선다고 아예 멈추는 건 아니니까. 결국엔 끝에 다다를 거요. 나야 호기심 때문에 속도를 늦췄지만 이제 어느 정도 결론이 난 이상 나도 다시 앞으로 돌아설지 모르지. 당신 말고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줬지만 다들 돌아서지 않더군. 하긴 더 지루하기만 할 뿐이지."
"네........"

777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777은 남자와 한참을 그렇게 대화를 더 나누었다. 남자는 자신을 그냥 모 대학에서 이런저런 연구를 하던 학자라고만 소개했다. 그 역시 소행성충돌로 벌어진 일련의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의 의도를 의심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들보다 우월한 미지의 외계종족이 이해득실을 일절 따지지 않고, 자신보다 미개한 종에게 이렇게까지 우호적으로 대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관해 777은 또다시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그에게 물었다.

"어쩌면 우리와 많이 닮아있는 종이 아닐까요? 그래서 조금 더 우호적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처럼 팔, 다리를 가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다섯 개고......."

777은 문득 자신의 네 개뿐인 손가락이 생각나 잠시 머뭇거렸다. 남자는 이번에도 거침없이 답을 했다.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 역시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대할 근거로 성립하진 않아요. 가까운 예로 우리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아주 미세한 차이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닮은 종입니다만 우리가 그들을 인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대접했습니까? 동물원에 보내거나 실험용으로 썼을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간 어쩌자고 우주에 그렇게 신호와 메시지를 보내왔는지 모르겠소. 어쩌면 그들은 그 한심한 메시지를 받고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그의 말에는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777은 이제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헛된 희망을 품는 것보다 빨리 포기하는 것이 편할 때가 있는 법이다. 거기다 한참을 이야길 나눴더니 기운이 빠져 피로가 몰려왔다. 남자도 마찬가지인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마치 잠을 자듯 눈을 감아버렸다.

777도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한참 뒤 깨어난 둘은 또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느린 이동속도 때문에

777은 남자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남자는 매우 논리적이며 박식하여 마치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777이 남자에게 바깥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다왔냐고 재차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전처럼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읽고 쓰는 일을 했었다고 답했을 뿐이었다. 777도 더 이상 묻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777은 마침내 남자를 스쳐지나가게 됐다. 고개를 뒤로 바짝 돌려야 그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777은 이제 그와도 작별인사를 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777은 언젠가부터 그를 박사님이라 부르고 있었고 그도 그에 관해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박사님 그동안 해주신 이야기들 감사합니다."
"나도 오랜만에 좀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네. 가끔 내가 이런저런 이야길 해주면 버럭 화부터 내는 사람도 있거든. 혹은 첫 질문부터 아예 답도 안하고 입을 닫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네........"

777은 내심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박사님은 언제쯤 돌아설 생각이신가요?"
"곧 돌아서야지. 한 사람만 더 인터뷰를 해보고 싶어."
"이미 결론을 내리셨다면서 그건 왜죠?"
"글쎄 왜일까? 솔직히 모르겠어. 내 생각엔 인터뷰 따위는 그냥 핑계인거 같아. 자네까지 벌써 오십 명이 아닌가. 아무래도 나 역시 자꾸만 희망이란 지푸라길 잡아보려고 하는 것 같네."
"아........"

그렇다.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잔인한 진실에 눈을 뜨고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서서 터널의 끝으로 가는 속도를 늦춰가며 벌써 50명이나 인터뷰랍시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사실이 생존과 구원에 관한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777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날 수는 없겠군요......."
"그래 그렇겠지. 혹......."
"네?"
“나야 신이나 종교 따위는 믿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썩어 없어지는 것이라 생각해. 하지만 지금으로썬 말이야....... 유물론자에 가까운 나조차 어찌됐건 막연하지만 말이야.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제 영혼이라는 게 존재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어. 원래대로라면 썩어서 흙이 되고 꽃이 될 수 있었을 거야. 순환하는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상태론 그냥 사라지는 거잖아.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무로 돌아가는 거지. 난 무엇보다 그게 두려워. 그러니....... 영혼이 존재한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죽고 나면 그때 다시 만나세.”

777은 왠지 뭉클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 실제로 눈물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777은 다시금 무기력감에 빠져들었지만 힘을 내어 답했다.

"네. 저도 그럴 수 있길 바랍니다. 아니 꼭 그렇게 해요. 다시 만나요. 감사했습니다."

777은 좀 우습지만 뒤를 돌아본 상태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777은 그렇게 박사와 헤어졌다. 아주 느린 속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등 뒤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77은 돌아보지 않았다.

777은 다시 홀로 터널 끝을 향해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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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13화부터 보게 되었는데 재미있어요 ~ 다음 내용이 기다려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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