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저 그레이브스 - 정신질환을 대하는 태도
주의 : 본 글의 내용은 영화의 강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신경증에 대한 내용입니다. 위의 책의 초안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1] 초기의 수용소 치료와 정신질환에 대한 태도
정신질환자들을 관리하는 수용소는 산업혁명 이후, 즉 18세기에 본격화됩니다. 수용소는 중세 시대부터 이미 존재해 왔던 시설입니다. 시골과는 다르게 도시에서는 광인들에 대해서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영국의 '구빈원'역시도 수용시설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설립된 전통적인 수용소입니다. 그러나 내부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현재의 정신 치료와 과거의 정신 치료의 이미지는 많이 다릅니다. 과거의 정신 치료에서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치료법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범죄에까지 활용된 '치료법'이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정신과 전문의이자 도 정신 치료를 창안하신 소암 이동식 선생의 강연에서는 과거 이루어졌던 정신 치료에 대해서 다음의 내용을 강연하셨습니다. 흥분이 심해서 그냥 둘 수 없는 경우는 격리실에 격리하거나 주사제를 통해서 진정을 시켰고 망상과 흥분이 심하면 고통스러운 주사를 통해서 아파서 망상에 신경 쓸 수 없는 치료를 했었습니다. 혹은 그 당시 최신 요법으로 인슐린 주사로 혈당을 떨어뜨려서 혼수상태에 빠뜨리게 하는 인슐린 혼수 요법도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런 방식을 사용하진 않습니다.
보통 알려져 있는 정신질환과 산업혁명 당시의 정신질환은 차이가 큽니다. 지금의 '해리장애', 즉, 히스테리는 최근 알려진 것처럼 기억이나 인격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를 읽어보면 생각지도 못한 사례들이 곧잘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부인 같은 경우는 신체 마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안나 O는 사용하는 언어가 독일어와 영어를 오가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독일어를 쓸 때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영어를 할 때는 독일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히스테리는 대유행을 했던 정신질환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 히스테리 환자들에 대해서는 정신의 통합 능력이 저하된다는 자네의 학설이 유명했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연구를 통해서 이를 단번에 뒤집어버립니다. 정신능력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합니다.
영화는 히스테리에 대한 강의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솔트 박사는 치료 중인 35세의 여성 히스테리 환자를 소개합니다. 극도로 폭력적인 이유로 헤로인을 투여해 몽롱한 상태로 만들어서 입장시킵니다. 솔트 박사는 그녀의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신체의 특정 부위를 건드리게 되면 발작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는 위치는 바로 '성감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트 박사는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그때, 그녀는 수강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자신은 미치지 않았으니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솔트 박사는 그녀의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퇴장합니다. 강의가 마치고 수강생들 중 하나가 질문을 합니다. 그녀가 미친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트 박사는 여기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녀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범죄자들의 무죄 주장과 같은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가 되려면 들리는 것과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믿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솔트 박사의 조언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의 주장은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함축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환자는 환자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신질환자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한들 그 행동은 결국 '미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범죄행위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해버리는 것입니다.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복잡한 내용보다는 간단한 내용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병은 병자와 구분이 지어져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신경증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현실에서 투쟁하다가 발생한 신경증의 문제는 바로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트 박사의 조언에서는 ‘죄인’으로 봅니다. 병을 병으로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린 사람을 죄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때 당시에는 치료적 의미에 다가가기보다는 '교정'의 영역에서 정신질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과거 정신질환의 치료에서 나타나는 효과 중 하나는 바로 '처벌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체를 괴롭게 해서 정신을 들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정신병원은 수용소라는 개념을 채택하게 됩니다.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한 군데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동네에서 함께 살았었습니다. 같이 밥도 먹었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사람들은 바빠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동네에서 '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관리 문제가 표면에 솟아오르게 되면서 그 부분을 의학이 담당하게 됩니다. 함께 어울렸던 그 사람들은 치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당시로는 별다른 수단이 없었습니다.
스톤 허스트 수용소에 젊은 의사 한 사람이 방문합니다. 약물치료 임상을 배우기 위해 방문한 에드워드 뉴게이트라는 이름의 젊은 의사입니다. 그는 수용소를 방문하고 병원 원장인 램 박사의 진료실로 안내가 됩니다. 진료실 안에는 각종 실험도구들이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구멍 뚫린 두개골의 모형을 바라봅니다. 램 박사는 그 두개골 모형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등장합니다. 악령에 씐 사람에게 시술하는 '천공술' 의 표본이었습니다.
정신질환에서 이중적인 모습들이 곧잘 드러나곤 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지킬과 하이드'같이 보입니다. 어떤 때는 멀쩡하지만 갑자기 흉폭 해지기도 하는 모습들이 마치 '악령'에 씌인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민간에서는 굿도 하고 퇴마의식도 진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형의 요소는 '히스테리'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원인은 없고 증상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와 램 박사의 대화에서는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정신질환이 가장 심각한 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과 존엄성, 영혼마저 앗아가는 것이 바로 정신질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치료'는 어땠었을까요? 이성과 존엄성, 영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치료방식도 개인의 자유의사와는 다른 강압적인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현대의 정신의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기이한 치료방식들이 과거 정신 치료의 역사에서는 곧잘 등장합니다. 서양에서 공포영화나 게임의 배경으로 정신병원을 채택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질환이 가장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과 존엄성, 영혼마저 앗아가버리기 때문입니다.>
- 에드워드 뉴게이트
램 박사는 에드워드 박사와 함께 병원 회진을 돌며 스톤 허스트 수용소에서는 명문가 자제들의 입원 사실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이유는 치료가 아니라 '가문의 수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철도에 관심이 없는 철도회사 후계자, 말에서 떨어지자 자신이 말이라고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에드워드 박사는 그들을 그대로 두면 망상만 더 심각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런데 램 박사는 역으로 행복하게 지내는 말을 다시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우리는 램 박사의 대답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증상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만족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증상으로 인해서 쾌락이 가능하게 되는 내용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증상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집중이 되어 있으며 당사자는 그 에너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신질환 전반에는 ‘자기사랑’이라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정신병자는 증상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고도 합니다. 증상을 통해서 만족을 얻고 있기 때문에 치료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치료보다도 ‘가문의 수치’이기 때문에 입원을 시킨 내용들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에드워드는 활기 넘치는 수용소의 분위기에 대해서 의외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 당시의 수용소는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수용이 되면서 그 분위기 자체가 무척 음울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활기가 넘치는 수용소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진정제를 투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제가 들어가게 되면 활기가 떨어집니다. 우리가 건강에 대해서 생각할 때 '활기'라는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활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건강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활기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정신건강과 정신위생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위생이라는 관점을 채택하게 된다면 문제 되는 부분을 제거해서 깨끗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융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신경증을 암처럼 치료하게 된다면 좋은 에너지도 같이 없애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경증을 암처럼 치료한다면 좋은 에너지까지 없애버릴 것입니다.>
- 칼 융
에드워드 박사는 식사를 거부하는 나이 많은 노부인을 보게 됩니다. 강제로 식사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영양 조관으로 음식을 주입하지 않았는지 질문합니다. 그러나 램 박사는 그 방식에 대해서 '중세 시대적 방법'이라고 폄하하면서 말합니다. 죽음은 막을 수 없고 정신병 역시 치료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 정신에 대한 치료제는 없고 찾으려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에드워드가 수용소에 온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그는 약물 임상을 배우고자 왔습니다. 그런데 램 박사는 약물 치료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약물보다는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통해서 일상생활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현대의 정신 치료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흡사합니다.
정신질환으로 인해서 식사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영양을 섭취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먹어야 자아가 기능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습니다. 식사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당연히 자아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식사를 거부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노부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망상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노부인의 사연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램 박사는 정신병은 치료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신분석 초기에도 이 말은 적용이 되었었습니다. 전이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정신병 환자의 꿈을 통해서 전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관찰했고 계속적으로 정신병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었습니다. 라캉과 같은 유명한 정신분석가는 정신병 중에서 '편집증'의 전문가이기도 했었습니다.
2] 광기의 이해
히스테리는 여성들이 걸리게 되는 대표적인 정신질환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남성들에게서는 히스테리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없었고 주로 여성들에게서 많이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는 남성들에게서도 히스테리 증상들이 종종 관찰됩니다.
램 박사는 입원 중인 한 여자 환자에 대해서 설명을 이어갑니다. 신체와 감정적인 접촉을 너무나도 음란하게 느끼는 환자로 소개합니다. 램 박사는 에드워드에게 진정제 처방보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먼저 보라고 말합니다. 곧 이어서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불쾌하고 돈이 많고 비정상적인 취향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했기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입원시킨지 일주일 후에 그녀가 치료되었음을 인정하라는 편지를 보내서 의사를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녀는 강의실에서 스스로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라고 수강생들에게 호소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일라이저입니다. 히스테리는 '미친' 것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히스테리 자라고 합니다. 하나의 성격 특성으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신경증에 걸렸다고도 오해를 사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일라이저는 무엇 때문에 남편을 공격하게 된 것일까요? 히스테리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성적인 혐오입니다. 그녀에게 남편이 그만큼 혐오스러웠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혐오스러움에 대한 과잉방어를 했다는 것입니다. 램 박사는 그녀의 증상에 대해서 어떤 처방을 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에드워드의 처방은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하루 세 번 처방하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승화는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 영화 속 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중에서
이 점에서 흥미로운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신경증에 시달리게 되면 리비도, 즉 , 에너지의 정체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에너지가 흐르지 않고 신체 부위에 집중이 되면서 고이는 것입니다. 이 리비도를 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다시 흘러가게 해주자는 것이 바로 에드워드 박사의 처방입니다. '승화'라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어떤 활동에 그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찜질'하는 것입니다.
리비도라는 말은 '성욕'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비도의 진정한 의미는 섹스를 위한 '성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비도는 남녀가 이야기하는 것에도 들어갑니다. 성을 바탕으로 해서 개인의 정체성 역시도 형성해 나갑니다.
신경증이 발생하게 되면 리비도가 흐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증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체된 리비도를 증상이라는 형태로 흐르게 만드는 작용입니다. 신체와 정신의 불균형을 다시 균형 있게 맞춰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경증이 발생하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증상을 통해서 리비도를 흘려보내는 순기능 역시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아주 뛰어난 외교관이라는 비유를 합니다.
에드워드는 일라이저에게 훌륭한 피아노 연주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의사의 접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일라이저는 그 칭찬에 불편해합니다. 에드워드는 다른 의사들과 다르다는 말로 친절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수용소에서는 식사도 다 함께 합니다. 환자와 상류층 사회를 섞는 '치료'라는 명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대의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질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땠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좋은 의사도 많았습니다. 수용소 치료의 등장 이전에 실시했던 도덕 치료를 통해서 회복시킨 사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용소 치료에서 도덕 치료의 정신이 사라지면서 정신질환자들의 관리에만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의 수가 급증하게 되자 감당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이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신경질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를 많이 쓰고 있지만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원점을 반복하게 되고 있으니 의사들도 괴로울 지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정신과 의사는 의사로 대우도 잘 받지 못했었습니다. 따라서 환자를 대하는 당시의 의사들의 태도는 경직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환자와 상류층을 섞는다는 것은 그 들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곧, 존경스러운 의사와 함께 있음이 그들의 치료에 긍정적인 효과들을 일으킨다는 것이 됩니다.
에드워드 박사는 램 박사에게 치료 계획을 묻습니다, 그는 환자들이 보통 사람들과 만나게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철창에 사람을 가두면 사람은 동물처럼 행동하고 자유를 주면 인간성을 기억하기 마련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외적으로 타인을 망가트려 희열을 얻는 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보통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정신질환자들의 문제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발병에 대해서 탐구한 결과, 그들의 정신질환은 스스로의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하다가 지쳐버린 상태입니다. 따라서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격리보다는 그 점이 더 치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경증자는 인류의 스승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하지만 무조건 적이진 않습니다. 타인을 망가트려서 희열을 얻는 사람에 대해서는 격리에 찬성합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지만 저지에 걸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답이 다른 사람의 파괴와 관련이 지어집니다. 정신질환의 큰 범주에서는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병의 세세한 내용들을 통해서 발견해 나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즉, 겉보기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램 박사는 에드워드에게 임상실습을 시킵니다. 바로 옥스브리지의 괴물이라고 불리는 정신질환자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입니다. 램 박사는 '눈을 쓰라'는 단서를 줍니다. 의사의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감금된 병실에 내려간 에드워드는 옥스브리지의 괴물로부터 습격을 받지만 주변 관찰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아내고 불러줍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히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서 램 박사는 무엇 때문에 '눈을 쓰라'고 했을까요? 단순히 관찰 차원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눈이 가지고 있는 상징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요? 상징적인 의미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옥스브리지의 괴물이 진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 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정신 장치에서 행동을 감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초자아'의 역할입니다. 초자아는 자아의 행동에 대해서 비판하는 기능도 있지만 동시에 공감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도 작용을 합니다. 사회생활에 도움을 주는 정신 기관입니다. 그런데 이 초자아가 병리적으로 작동하게 된다면 오히려 대인관계 문제에서 실패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면 분명 행동에는 제약이 걸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바로 감시의 눈이라는 심리 실험입니다. 2006년 영국 뉴캐슬대 연구팀이 교직원용 구내식당에 자율 계산대를 설치했습니다. 사람의 눈 사진을 붙여놓은 경우와 꽃 사진을 걸어두었을 때 걷힌 자율 계산 액수의 차이가 2.8배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뉴캐슬대 연구팀은 인간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대 바른 행동을 하려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실험 결과를 토대로 해서 우리는 옥스브리지의 괴물이 시선에 대해서 반응하는 한가지 단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의 인격이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옥스브리지의 괴물과 또 다른 인격인 '아서'가 바로 그렇습니다. 인격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해서 분열은 아닙니다. 강박증이나 히스테리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호칭의 문제도 추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를 옥스브리지의 괴물이라고 하면 그는 괴물이 됩니다. 그리고 아서라고 불러주면 그는 평범한 인물이 됩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말하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서를 바라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누군가의 시선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서로 지내기에 괴로웠던 그는 괴물인 상태를 선택합니다. 따라서 그 누구의 시선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아서’로 지내기에 더 괴로운 어떤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는 그를 바라보고 이름을 찾아주었고 폭력을 견뎌내면서 그의 분리된 인격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아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심의 효과입니다. 사소하게 느껴지지만 잊힌 것들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후에 에드워드 박사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감금되어 있던 솔트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원래 스톤 허스트 수용소의 원장입니다. 그는 램 박사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해줍니다. 그는 원래 군의관이었고 이름은 사일러스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수로 활동하고 있는 미키 핀은 과거 어머니와 여동생을 살해한 범죄자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일러스는 야만적인 치료방식에 대해서 강렬하게 저항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솔트 박사는 사일러스의 광기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공포'를 발견해야 한다고 진료 일지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것이 정신이상에 대한 열쇠와 통제를 갖게 해준다고요. 그가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솔트 박사의 기록은 정신질환을 어떤 방식으로 치료해왔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줍니다.
그는 공포를 통해서 정신질환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공포를 통해서 그들이 사회에 다시 통합되는 길을 마련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과연 공포가 정신질환의 통제 방식으로 사용될 수가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신 치료의 초기, 도덕 치료에서도 공포나 고통에 노출되지 않고 적당한 구속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 식었습니다. 그런 원칙에서 어긋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일러스는 솔트 박사와 대화를 하고자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서 비난을 합니다. 그는 솔트 박사처럼 잔인하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직원들을 통해서 식량을 더 보급해주겠다고 합니다. 솔트 박사는 직원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칩니다. 자위 중독자와 알코올중독자가 직원이 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일러스는 자위 중독으로 인해서 피해가 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그 말을 받아칩니다. 되려 치료 상황이 예전보다 더 긍정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과도하게 처방되던 아편을 끊자 무기력증이 사라졌고, 몽고증환자(다운증후군)도 부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일러스가 어떤 식으로 그런 효과를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편은 신경계에 작용을 합니다. 따라서 무기력이 유지가 된 것은 약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운증후군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교육에 맞춰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치료보다 교육을 통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다운증후군 같은 선천적인 염색체 이상을 정신질환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정신에 대해서 다른 신경증의 진단명을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환자들에 대해서는 솔트 박사보다 사일러스가 인간적이고 계몽적인 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억지로 치료를 하는 것보다 공동체를 형성해서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간호사 역할을 맡고 있는 밀리는 눈이 먼 늙은 부인의 식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식사를 계속 거부하는 부인을 견디지 못하고 짜증을 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무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는 밀리에게 휴식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박사는 그 부인의 망상에 참여합니다. 바로 부인의 이미 죽은 아들을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연기로 인해서 스스로 식사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어 비칩니다. 에드워드의 연기는 부인의 망상에 대한 '설득력을 가진 가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인에게는 망상의 도움이 있어야 했고 그 망상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망상에 참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현실의 차원입니다. 부인에게 중요한 현실은 바로 정신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인의 식사 거부에 대한 사연은 자신이 음식을 먹으면 아들이 그만큼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인의 식사 거부는 죽은 아들을 보낼 수 없는 어머니의 애달픈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어머니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외부의 삶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 내면의 삶이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 조르주 아감벤
사일러스는 에드워드에게 스톤 허스트 수용소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환자로 솔트 박사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전기치료를 실시합니다. 전기치료 후에 솔트 박사는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는 멍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전기치료의 방식은 현대에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전기치료를 통해서 임상적으로 많은 정신질환에 대해서 호전을 보이게 되었다는 사례들은 익히 들어볼 수 있고 의학적으로도 이미 효과가 규명이 된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정신분석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다릅니다.
전기치료를 통해서 솔트 박사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상태가 된 것을 두고 과연 치료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일러스는 망상에서 평온을 찾은 것으로 상태를 설명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일반인에게도 치명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정신질환이 발생한 사람이라고 해서 치명적이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괴로운 내용입니다.
여기서 실시한 전기치료는 전두엽 절제술이라는 수술과도 흡사하게 보입니다. 전두엽을 절제당한 정신질환자는 마치 좀비처럼 단순노동만을 하게 됩니다. 뇌 기능 자체를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 지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경증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정신 기관은 바로' 자아'입니다. 자아를 파괴하거나 마비시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마비 효과가 일어나는 것을 두고 치료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뇌를 파괴할 때, 인생도 함께 파괴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정신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정신질환은 인생을 파괴하는 것 아닌가?
치료가 정신을 파괴한다면 치료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3] 치료 불가능의 의미는 무엇인가?
19세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스톤 허스트 수용소의 각종 가구들을 태우는 캠프파이어가 벌어집니다. 행사에 참석하려 하는 일라이저는 동생처럼 아끼는 밀리에게 나오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밀리는 혼자 병원 복도에서 춤을 춥니다. 그 모습을 본 미키 핀은 함께 출 것을 제안합니다. 제안을 수락한 밀리와 함께 춤추던 중에 미키 핀이 강압적으로 키스를 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곧 밀리가 키스를 더 강렬하게 원합니다. 그는 그런 밀리를 목 졸라 살해해버립니다. 사일러스는 밀리의 죽음을 엉터리 진단으로 얼버무려 버립니다.
어째서 미키 핀은 밀리를 살해한 것일까요? 먼저 미키 핀에 대한 단서는 그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 알 수도 없습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살해해야 했을까요? 우리는 밀리와 미키 핀의 장면을 다시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키 핀은 밀리에게 유혹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혹에 폭력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혹당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앞서 일라이저도 남편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해서 폭력적으로 반응을 했었다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미키 핀 역시도 성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키 핀이 능동적일 때는 괜찮으나 수동적인 위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유혹의 문제는 가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살해한 동기에 대해서도 유혹 환상이 작동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근친상간의 유혹 환상이 그를 덮쳤다면 폭력적인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살해의 이유가 유혹에 대한 방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키 핀은 현실에서의 효율이 저하되지 않았습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이 저하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일러스는 조수로 미키 핀을 쓰지만 자신의 후계자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일러스의 생각대로 라면 격리시켜야 할 정신질환자를 미키 핀으로 보고 있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끝내려고 하다가 전기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일라이저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전기치료를 시술하려는 사일러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주머니 속의 사진을 일라이저에게 전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진을 확인한 사일러스는 갑자기 멍해집니다. 사진을 통해서 억눌러 놓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튀어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일러스에게 보이는 환영에 의해 그 자리를 떠나고 맙니다. 당황한 미키 핀이 강제로 전기치료를 실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라이저가 그 치료를 방해합니다. 에드워드를 풀어주려고 하지만 미키 핀이 뒤에서 껴안아 그녀의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고 맙니다. 에드워드는 일라이저에게 자신을 보라고 말합니다. 순간 그녀는 히스테리 증상을 이겨내고 미키 핀을 제압합니다.
그녀는 어떻게 히스테리 증상을 극복한 것일까요? 일상에서 일어난 치료적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히스테리가 가지는 성적 혐오는 무척 강렬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신체에 닿는 접촉감으로 부터 연상되는 것들이 정신에서 강렬한 흥분을 일으키고 신체로 일정량의 흥분을 흘려보내 증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히스테리는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 또 다른 흥분과 겹쳐져서 일정 부분 중화되는 효과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서 발생한 흥분 B와 원래 자리 잡혀 있던 증상으로 일어나는 흥분 A가 서로 상쇄 작용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히스테리 발작은 빠른 시간에 완화되어서 미키 핀을 제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라이저에게 있어서 히스테리보다 더 강한 정신적 흥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에드워드에 대한 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속에서 풀려난 에드워드는 사일러스를 찾으러 갑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재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부상병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지 못 해서 부상병들을 모두 죽여서 고통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도 자살하고자 했으나 총알이 모두 소진되어 자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고통에 울부짖는 부상병들의 목소리는 사일러스에게 고통스러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했던 만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치료 역시도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고 싶었던 강한 소망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일러스에게는 이 상황이 견디기 어려운 트라우마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에 외부 자극에 대한 자극 보호대를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극 보호대가 견딜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충격이 외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여 정신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두고 '트라우마'라고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를 ‘외상’으로 번역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외부의 충격을 정신이 견뎌낼 수 없을 때, 자극 보호대가 무너져버리는 것이 트라우마>
사일러스에게 이 상황은 견딜 수 없는 상황, 즉, 외상(Trauma)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쟁터의 상황을 혼자서 재현해야만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다시 다가오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를 반복적으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해당하는 현상입니다. 그는 그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 합니다. 따라서 그의 정신은 붕괴되어 자아가 마비되는 끔찍한 사태를 경험합니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얼마 후 스톤 허스트 수용소에는 두 명의 남자가 방문합니다. 그 들은 주치의가 누군지 물어봅니다. 수간호사는 에드워드 뉴게이트 박사라고 답변을 합니다. 여기서 의외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로 방문한 사람이 에드워드 뉴게이트 박사라는 것입니다. 앞서 에드워드 뉴게이트 박사로 왔다는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훔친 치료 불가능한 공상허언증 환자라고 합니다. 그는 일라이저 부인에게 반해서 여기로 자신의 신분을 훔쳐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간호사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같은 시간 에드워드는 이탈리아의 산타 크리스티나 수용소에서 램 박사로 자리를 잡습니다. 일라이저 부인은 램 박사의 부인으로 함께 춤을 춥니다.
치료 불가능이 가지는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치료를 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현대에도 일어납니다. 치료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증상으로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당사자가 치료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신경증은 억지로 고쳐준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일상생활에서 창의적으로 환자들을 대하고 치료 효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설득력 있는 가설들을 동원하여 월등히 뛰어난 치료 효과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일라이저의 히스테리에 접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치료 불가능의 의미는 그가 정신적인 질환의 문제가 아니라 정해진 ‘법’을 자기 맘대로 다루는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교정적 의미의 치료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신경증은 ‘법’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법’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그 내용들을 바꿔놓았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정신질환자로 둔갑시킨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정신질환을 범죄와 연관시키는 일반의 태도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