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 만화는 어떻게 검열의 시대를 돌파했을까? 1. 일본편

in #comics-censorship7 years ago

만화는 근대매체로 출발할 때부터 노동자, 이민자, 어린이들을 위한 저렴하고 쉬운 (싸구려) 매체였다. 만화가 근대매체로 탄생할 때부터 보수적 중산층은 새로운 매체를 싫어했다. 저질, 타락 같은 단어들이 동원되었고, 보수적인 중산층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은 만화를 효과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고, 실천했다. 중산층 지식인들은 윈저 맥케이처럼 그들은 생각하는 이상적인 만화를 만들거나(그나마 이런 대응은 양호한 편이다),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조성하거나, 반대운동을 전개하거나, 압력을 가하거나, 법을 만들었다.

일본의 만화검열

1937년 4월 1일 일본 제국의회는 법률 제55호로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정부가 통제하는 취지의 법률인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을 제정한다. 1938년 2월 당시 어린이들을 위한 싸구려 책인 ‘아카홍(赤本 : 1940년대 후반부터 오사카의 완구 도매상가인 맛차마치(松屋町) 주변에서 출판되던 만화책)’의 편집자들을 모아 앞으로 만화도 검열을 받을 것이라 지시하기도 했다.

10월 내무성 경보국 도서과(内務省啓警保局図書課)에서 ‘아동 읽을거리 개선에 관한 지시요강(児童読物改善に関する指示要綱)’을 발표한다. 이 규정에서는 어린이 출판물의 표현수위를 포괄적으로 제한했다. 예를 들어 과도하게 감상적인 표현(過度に感傷的なるもの)을 사용하거나, ‘사랑의 도피(駆け落ち)’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규제대상이었다.

과도한 허구도, 화려한 소비를 묘사한 것도 제한대상이었다. 외설스럽고(卑猥), 저속(俗悪)한 만화는 폐지하고, 잡지에서 만화의 분량을 줄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외설스럽고 저속한 만화를 가르는 기준은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는 정부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었다. 외설스럽고 저속한, 즉 불량만화를 단속한다는 명분을 걸었지만, 실은 전쟁동원기 출판사를 길들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지시요강 이후 만화를 포함한 어린이책 33종이 판매금지처분이 내려졌고, 어린이 잡지는 군국주의적 내용의 기사나 삽화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패전 후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아카홍은 큰 위로가 되었다. 오사카의 완구 도매상가인 맛차마치스지(松屋町筋) 상가에서 유통된 아카홍은 구멍가게(駄菓子屋)나 노점 등에서 어린 독자들에게 직접 판매되었다. 10-50엔, 비싸도 70엔 정도였으며, B6판에 24-48 페이지 분량이었다.

1947년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신보물섬(新宝島)>이 크게 히트하며 아카홍 붐이 일어났다. 아카홍은 ‘붉은책’이라는 별칭이 상징하듯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단 괴수, 액션, 판타지 등의 장르가 많았다.

아카홍은 별 제약없이 제작되어 테즈카 오사무처럼 젊은 작가들이 신선한 작품이 나오는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자극적 표현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주간아사히(週刊朝日)>1949년 4월 24일자 ‘어린이의 아카홍 저질만화를 공격하다(こどもの赤本 俗悪マンガを衝く)’는 기사에서 만화를 보고 중학생이 불량조직을 만들었거나, 여동생과 싸워 가출했는데 만화의 줄거리를 흉내낸 거라거나, 범죄수법을 배울 수 있다거나, 만화를 보고 싶어 훔치게 된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들며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週刊朝日> 1949년 4월 24일자

일본 경제가 회복되면서 대본 만화나 잡지연재, 잡지 별책부록 등 다양한 형태로 만화가 출판되었다. 1950년 11월부터 테즈카 오사무가 『만화소년(漫画少年)』에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를, 1951년 4월부터 『소년(少年)』에 <아톰대사(アトム大使, 철완아톰의 전신. 1년 뒤에 철완아톰 연재 시작)>를, 1953년 1월부터 『소녀클럽(少女クラブ)』에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를 연재하며 만화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1954년 3월 전해의 소득신고기준 테즈카 오사무가 연수입 217만 엔을 벌어 간사이 지역 화가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鳩山一郎

1955년 1월 22일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총리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불량출판물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어 민간단체의 협력을 얻어 근절시키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政府としては、 広く民間諸団体の協力を得まして 、早急にこれが絶滅のため適切有効な対策を講じ、もつて明朗な社会の建設に邁進いたしたいと存ず” (일본국회회의록 http://kokkai.ndl.go.jp/)

연이어 3월부터 <일본독서신문(日本読書新聞)>에 어린이 잡지와 만화책을 고발하는 연속기사가 나왔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과 같은 주요 일간지에서도 기사를 내보냈다. 1955년 5월 16일 출판물윤리화운동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일본 어린이를 지키는 모임(日本子どもを守る会), 어머니회 연합회(母の会連合会),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 등이 ‘악서추방운동(悪書追放運動)’을 진행했다.

도쿄 어머니회 연합회에서는 5만 권에 달하는 만화, 어린이잡지, 에로도서 등을 수거해 폐기하기도 했다. 거리에 ‘악서’를 수거하는 통이 나왔으며, 학교 운동장에서는 만화책이나 잡지 등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행사가 벌어졌다. 정부와 학부모 단체는 ‘청소년보호육성법(青少年保護育成法)’을 제정해 만화를 비롯한 청소년용 도서를 사전에 검열하려고 했지만, 출판사와 만화가 등의 강력한 반발로 법 제정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에서 청소년보호육성조례(青少年保護育成条)를 만들어 만화를 단속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깨끗이 지우고 고도성장 시대를 맞이한다. 1964년 개최된 도쿄올림픽은 달라진 일본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국가 이벤트였다. 고도성장과 함께 물가가 오르자 저가에 판매해 인기를 끌던 아카홍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아카홍의 빈 빈자리를 메꾼 건 1959년도에 대형 출판사 고단샤(講談社)와 쇼가쿠칸(小学館)에서 연이어 창간한『주간소년매거진(週刊少年マガジン)』과 『주간소년선데이(週刊少年サンデー)』였다.

한 권에 여려 편의 만화를 볼 수 있는 만화 주간지에 인기 만화가의 작품이 연재되며 어린이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만화잡지시대가 되었지만 만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정부와 학부모 단체의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보다 안정적인 시장환경을 만들기 위해 1963년 12월 12일 일본 잡지협회(日本雑誌協会), 일본서적출판협회(日本書籍出版協会), 일본 출판중개인협회(日本出版取次協会), 일본 출판물소매업조합 전국연합회(日本出版物小売業組合全国連合会)가 모여 만화자율규제를 위한 출판윤리협의회(出版倫理協議会)를 설립했다.


<내일의 죠(あしたのジョー)>

1966년 『주간소년매거진』에 연재된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 카와자키 노보루(川崎のぼる)의 <거인의 별(巨人の星)>이 당대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프로야구를 소재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아내 큰 인기를 얻는다. 1968년부터 같은 잡지에 연재된 카지와라 잇키, 치바 데츠야(ちばてつや)의 <내일의 죠(あしたのジョー)>는 만화 독자층을 청년층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오른손엔 매거진, 왼손엔 아사히저널(右手にマガジン、左手に(朝日)ジャーナル)’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화는 카운터 컬쳐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1968년 8월 1일 『플레이보이』를 출간하던 슈에이샤(集英社)는 새로운 만화잡지 『주간소년점프(週刊少年ジャンプ)』를 창간한다. 후발주자였던 『주간소년점프』는 선발주자들보다 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며 표현의 수위를 끌어올렸다. 잡지의 성격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1968년 11호부터 연재된 나가이 고(永井豪)의 <파렴치 학원(ハレンチ学園>이다. <파렴치 학원>은 (소년)만화에서 한번도 다루지 않은 방식으로 성과 폭력을 다루었다. 변태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라는 테마를 다뤘지만, 속옷차림은 물론 누드까지 거침없이 묘사되었다.


<파렴치 학원(ハレンチ学園)>

1970년 <파렴치 학원>에 묘사된 치마 들어올리기가 학교에서 유행하자 PTA는 만화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미에현과 후쿠오카현 등 몇몇 지자체에서는 유해도서로 지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같은 해 테즈카 오사무의 <자포자기 마리아(やけっぱちのマリア)>(『주간 소년챔피언(週刊少年チャンピオン)』)와 <아폴로의 노래(アポロの歌)>(『주간소년킹(週刊少年キング)』)의 성표현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자포자기 마리아>는 후쿠오카현에서, <아폴로의 노래>는 가나가와현에서 유해도서로 지정되었다.(中村紀、大久保太郎「漫画の事件簿 漫画と社会、激闘の歴史50年」『まんが秘宝 つっぱりアナーキー王』洋泉社、1997年、p.197)


<자포자기 마리아(やけっぱちのマリア)>

1973년 최초의 성인용 극화잡지인 『만화에로토피아(漫画エロトピア)』가 창간되었다. 대형출판사의 청년 만화잡지와 달리 성적 표현의 수위를 높인 에로극화, 관능극화라 불린 성인만화를 수록해 인기를 끌자 영세중소출판사들이 유사한 잡지들이 대거 창간한다. 1970년대 불붙은 에로극화붐은 월간 50종에 증간, 별책, 별책증간까지 포함하면 100종에 가까운 에로극화잡지가 출간되기도 했다.

1978년 11월 에로극화잡지 붐이 정점에 올랐을 때 『만화에로제니카(漫画エロジェニカ)』가 형법 175조 외설도화반포죄로 적발되기도 했다. 에로극화잡지는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삼류라고 구분지으며 메이저 잡지에서는 불가능한 표현의 자유를 얻는데 성공했다. 수많은 에로극화잡지 중 3대 에로극화잡지로 불리는 『만화에로제니카(漫画エロジェニカ)』,『만화대쾌락(漫画大快楽)』,『극화 앨리스(劇画アリス)』는 일류, 이류 잡지가 하지 못하는 다양한 실험을 삼류 잡지에서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만화에로제니카(漫画エロジェニカ)』 80년 3월호

『극화 앨리스(劇画アリス)』의 편집자인 카메와타 타케시(亀和田武)는 1960년대 활발하게 등장한 에로극화잡지를 삼류잡지라 분류했다.

“지금까지 청년만화잡지는, 일류가 『빅코믹』, 『만화액션』, 『영코믹』. 이류는 『플레이코믹』, 『만화선데이』등에서, 나머지 삼류 이하인 하이얼라키가 고정되었다.(それまでの青年コミック誌は、一流が「ビッグコミック」「漫画アクション」「ヤングコミック」。二流は「プレイコミック」「漫画サンデー」などで、残りが三流以下というヒエラルキーが固定していた。)”(‘マンガの神様も読んだ「劇画誌の黄金時代」を亀和田武氏懐古’, 『SAPIO』 2016년 9월호)

그 결과 아즈마 히데오(吾妻ひでお), 이시카와 쥰(いしかわじゅん), 모로호시 다이지로(諸星大二郎)처럼 개성있는 작가의 작품들이나 『가로(ガロ)』와 『COM』등에서 데뷔한 젊은 작가 에비스 요시카즈(蛭子能収), 미야니시 케이조(宮西計三),  히라쿠치 히로미(平口 広美), 타카노 후미코(高野文子) 등의 실험적인 작품이 연재되었다. 3대 에로극화잡지는『COM』과 『가로(ガロ)』의 빈자리를 채우며 1970년대 후반 극화 뉴웨이브를 끌어갔다


『만화 웃음학교(まんが笑学校)』 83년 7월 표지일러스트(아즈마 히데오)

1988-1989년 도쿄와 사이타마에서 4-7세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유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89년 7월 23일 범인 미야자키 츠토무(宮崎勤)가 다른 범죄를 저지르다 현장에서 붙잡혀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범행이 밝혀졌다.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방에서 대량의 비디오 테이프와 만화책이 나왔고, 코믹마켓에 동인지를 출품한 경력이 밝혀지면서 언론은 미야자키 츠토무를 ‘오타쿠’로 몰아갔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성토했다.

1982년부터 1970년대의 에로극화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코믹마켓 동인지 중심의 로리콘 만화가 인기를 얻었을 때였다. 만화, 특히 로리콘 만화에 비난이 쏟아졌다.『주간영선데이(週刊ヤングサンデー)』에 연재되던 유진(遊人)의 'ANGEL'이 연재중단되는 등 출판사 스스로 자기규제에 들어갔다.

다음 해인 1990년 9월 4일자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시판중인 332종의 만화잡지에서 “만화의 50퍼센트는 성적묘사를 포함, 8%는 자위행위를 그렸다(漫画の50%は性的描写を含み、8%は自慰行為を描いていた)”다며 만화표현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 사설을 시작으로 유해만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진다.

‘만화책에서 어린이를 지키는 모임(コミック本から子どもを守る会)’이 결성되고, PTA 등 학부모 단체가 합류하면서 대대적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학부모들이 만화규제에 운동에 참여하며 <북두의 권>이나 <드래곤볼>같은 소년만화도 폭력적이라 비난받았다. 출판윤리협의회는 각 출판사들에게 자율규제를 요청했지만 파문을 가라앉지 않았다. 1991년 도쿄도 의회는 청소년보호육성조례이 강화에 나섰고, 집권 자민당은 아소 다로(麻生太郎)를 회장으로 ‘어린이 포르노 만화 등 대책의원 간담회(子供向けポルノコミック等対策議員懇話会)’를 결성했다.


麻生太郎

1999년 11월 아동 포르노’의 범주에 ‘그림’이 포함 된 ‘아동매춘, 아동 금지법(児童買春・児童ポルノ禁止法)’이 시행된다. 2000년 5월 ‘청소년유해환경대책법안(青少年有害環境対策法案)’의 초안이 발표되고, 2001년 자민당은 ‘청소년유해사회환경대책기본법안(青少年有害社会環境対策基本法案)’을 발표한다. 2010년에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을 위한 조례’가 개정되면서 도쿄도는 만화 규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만화계를 비롯해 언론, 문화계에서 반대운동을 했지만, 결국 가장 문제가 되었던 ‘비실재 청소년’ 규정만 삭제한 채 통과되었는데, 도지사가 불건전 도서를 지정할 수 있다 명시하면서 규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계속)

(C)comixpark / Park In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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