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수필]스마트 시대에 구시대의 다이어리를 구현하는 법
다이어리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다이어리를 언제부터 썼는가 거슬러올라가보면 아마 초등학교때부터였을 것이다. 저학년 때는 알림장을 의무적으로 썼는데, 이 의무가 사라지면서 더 간편하고 주머니에 소지할 수 있도록 작은 슬램덩크 수첩을 사용하기 시작한 게 그 시초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것은 그 수첩의 시스템이었다. 날짜가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종이를 소모해버리는 게 싫었기 때문인지 나는 일곱 장에 걸쳐서 월화수목금토일이라고 적어놓고 필요한 사항을 연필로 적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기억할 필요가 없게 된 사항은 지우개로 지웠다. 그런 방식으로 일년 쯤을 썼을 것이다. 가난뱅이 근성 때문에 묘하게 디지털에 가까운 방식을 쓰게 된 셈이다. 그런데 2주일 이후에 있을 일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 시절에는 다음 주 이후의 미래 같은건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는 마법소녀 리나 등의 인화 사진(그 시절에는 거리의 팬시 가게에서 애니메이션 이미지, 연예인 사진 따위를 멋대로 뽑아다 팔곤 했다)을 다이어리에 끼우는 게 유행해서 나도 다이어리 비슷한 것을 잠깐 썼다. 그러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1년치 달력이 깔끔히 인쇄된 수첩을 쓰기 시작했다. 펜과 수첩을 항상 소지하고 선생님이 뭘 말하면 그 자리에서 받아적는, 무슨 형사나 기자 같은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평범한 소년은 아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다행히 평범함의 미덕을 깨닫고 속지를 갈아끼울 수 있는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중간에 잠시 PDA를 쓰기도 했지만, 초기 모델이라 불편하기도 했고 너무 눈에 띄어 다시 다이어리로 돌아왔다.
대학교2학년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사전과 텍스트 편집이 가능한 모바일 기기가 필요해서 고심끝에 다시 PDA를 장만했다. 그 선택은 제법 탁월한 편이었다. 요즘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기기에 비하면 상당히 뒤떨어진 물건이긴 하지만 제법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아무리 초기형보다 나아졌다곤 해도 일정을 관리하기가 편치는 않았다는 것이다. 요즘 기기처럼 앱을 실행해서 멀티터치로 타다닥 일정을 입력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다이어리처럼 간편히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앱을 실행하고 스타일러스로 키보드를 하나씩 꾹꾹 누르는 방식이었으니 불편할 수밖에.
그래서 내가 고심끝에 고안한 방법은 바로 펜글씨 노트 작성 앱에 일 년치 달력을 그려넣어서 다이어리로 쓰는 것이었다. 요는 다이어리의 아날로그 방식 자체를 디지털 기기 안에 구현해버린 셈인데, 스타일러스를 쓰는 기기에서 쓰기에는 제법 합리적이고 편리한 방법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지금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쓰고 있다. 이것들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탁월한 스마트 기기다. 몇 년후의 일이든 빠르게 기록할 수 있고, 순식간에 검색할 수 있으며, 필요할 때 알람을 설정할 수도, 일정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초대 메일을 보낼 수도 있다. 매번 생각하지만 썩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디지털 작업은 정말 빠르고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날로그 작업에 있어선 딱히 발전이 없었던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서, 12월 달력을 펼쳐놓고 모든 일요일을 커다란 동그라미로 묶으며 ‘주말은 잊지 말고 청소할 것' 등의 메모를 적어놓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요일마다 알림을 설정하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상당히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데다가, 내 손으로 쭉 선을 긋고 손글씨를 적어넣는 맛이 살아남지 못한다. 다이어리를 쓸 때는 중요한 날에 별표나 동그라미를 그려넣기도 했고, 디데이를 세면서 하루가 지날 때마다 칸에다 X자를 칠 수도 있었는데, 구글 캘린더 같은 걸론 이게 영 구현되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포기하기에는 아무래도 억울한 감이 있다. 편리함과 감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마법 같으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잘도 하는데 '다이어리를 펼쳐서 쓱쓱 메모를 한다'는 그 간단한 과정을 여태 따라잡지 못한단 말인가?
나도 이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최근까지도 검색을 하고 또 해봤지만 그런 게 가능한 앱을 앱스토어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있는데 아직 못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Penultimate가 손글씨 앱으로는 탁월하고 다양한 템플릿을 제공하긴 하지만 달력에 날짜를 다 써넣어야 한다.
내가 핸드라이팅으로 찾은 것 다이어리앱 중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은 Palu라는 앱이다. 요 녀석은 표시되어 있는 달력의 칸을 누르면 화면이 전체로 확대되어 손으로 메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메모를 마치고 저장하면 다시 축소되어 달력으로 돌아가는데, 이렇게 이런저런 메모를 한 달력은 예전에 쓰던 다이어리와 모양이 제법 비슷한 편이다. 여러 날에 걸쳐 선을 그려넣으려면 하루하루 일일이 열어서 선을 그려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보다는 나은 편이라 이것을 사용하기로 작정했다. 예전처럼 달력을 그려 넣거나 달력 PDF를 불러와서 덧그리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전세대의 기기로 하던 짓을 또 하기가 영 억울했기 때문이다. 제발 누군가 뜻있는 분이 낙서마저 할 수 있는 다이어리 앱을 만들어주시길.
(디지털적으로 별 의미없는 부분이 뜻밖에 가장 중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앱을 예전에 쓰던 방식대로 쓰고 있지는 않다. 앞으로의 일정은 구글 캘린더를 지원하는 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편이 알림을 설정하고 검색하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다이어리 앱은 그와 반대로 과거의 일정을 정리하는 데 쓰고 있다. 일기야 일기 앱으로 쓰고는 있는데, 이것은 그냥 텍스트의 나열에 불과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다. 그래서 지난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록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성한 일기에 붙인 태그만이라도 달력에 띄워주면 좋으련만, 그런 점에서는 역시 디지털이 모자란 면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잠시 딴 얘기가 되는데, 연말이라 '나는 대체 올해 뭘 했단 말인가' 싶은 분은 꼭 달력 형태의 다이어리로 과거를 정리해보길 바란다. 회사원이야 물론 디지털로 깔끔하게 정리된 일정표가 있겠지만 거기에 자신의 개인사는 들어가있지 않으니 일기나 사진첩, SNS따위를 보고 과거를 추적해보는 것도 꽤 흥미롭고 보람있는 일이다. 나도 그런 후회가 들어 올해 일기를 다시 읽으며 달력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 작업을 했고, 어떤 이벤트가 있었는지 정리를 해봤다. 그 결과 그럭저럭 고군분투하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살았다고 보여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 작업이 재작년으로 넘어가자 방황하고 낭비한 시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게 낱낱이 드러나 '왜 이 정리를 어릴 때부터 하지 않았지'하는 생각에 괴로워졌지만.......
요는 다이어리가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각각의 데이터가 연속성을 잃고 파편화되고 말았고, 나는 그 탓에 기록의 정확성을 얻은 대신 확인의 명료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2020년쯤 되면 달력 앱 하나에서 일정 미리알림도 설정하고 운동 기록도 보고 일기도 보고 별표도 치고 스티커도 붙이고 낙서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희망적이진 않다.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종이 다이어리를 장만할 것이고, 정확한 디지털 일정은 별개로 존재할 것이며, 나는 계속해서 화면 속의 다이어리에 메모를 할 것 같다.
(2017.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