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우리 모두는 심장이 '바운스' 뛰는 존재들이다. 영화 <버닝>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봤다. 그리고 이 후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택배 기사 종수(유아인)가 배달을 갔다가 나레이터 모델일을 하는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둘은 같은 동네(파주)에 살던 고향 친구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고양이를 돌봐달라며 부탁한다. 해미가 귀국하는 날, 공항으로 마중나간 종수는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만났다는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 받는다.
벤은 종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츠비"다. 개츠비란 젊고 부유한데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벤은 포르쉐를 몰며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분이 안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 놀고 먹는 돈 많은 집 아들이다. 해미는 종수의 낡은 트럭에서 벤의 포르쉐로 갈아 탄다.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셋이 갈등을 겪는 얘기가 영화의 전부다. 간간이 종수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해미의 사생활 등이 엿보이긴 하지만 큰 줄거리는 이게 끝이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이 단순한 삼각관계 스토리 안에 사회적 메시지를 녹여내었다. 이는 여러가지 상징으로 영화 속에 놓여져 있다. 나는 내 나름의 시각으로 그것을 풀어보고자 한다.
우선 이 영화는 계급 갈등을 다룬다. 벤으로 대변되는 부자 계급과 해미와 종수로 대변되는 가난한 계급이 만난다. 이때 벤은 해미와 종수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유희'로 취급할 뿐이다. 이를 상징하는 장면이 몇 있는데,
벤은 종종 "재밌네"라는 말을 연발한다. 종수와 처음 만나 곱창전골을 먹으러 가서도 종수가 소설을 쓴다고 하니 "재밌다"고 표현한다. 또 종수의 파주 집에 놀러 갔을 때, 북한의 대남 방송을 들으며 "재밌네"라고 말한다. 종수에게 '소설 쓰기'와 '대남 방송'은 구체적 삶의 한 부분이다. 소설 쓰기는 복잡하지만 이루고 싶은 꿈이면서, 대남 방송은 단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일상이다. 하지만 이를 듣는 벤에겐 단지 '재미'일 뿐이다.
해미는 벤의 부자 친구들 사이에서 아프리카 여행담을 풀어 놓는다. 이때 해미는 춤을 추는데, 부자 친구들의 반응은 애매모호하다. 이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핵심은 벤이 하품을 하며 지루해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장면은 해미 다음의 여자친구가 자신의 일상을 부자 친구들 사이에서 풀어 놓는 것에서도 등장한다. 그리고 벤은 새로 사귄 여자에게 화장을 해준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해미에게도 똑같이 화장을 해줬을 것이다. 벤에게 여자들은 하나의 '유희'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양쪽 극단에 서 있는 각각의 계급은 만나기 어려운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용산 참사를 그려 낸 그림이 전시된 공간에서 벤은 가족들과 화목한 만찬을 하지만 종수는 그림 앞에서 어색하게 서성인다. 벤이 헬스클럽에서 러닝을 하는 동안 종수는 버스 정거장에서 빵과 우유를 먹는다. 이 둘은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도 있지만 절대 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는 없다.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히 '반포'와 '파주'로 대변되는 삶의 공간이 아니다. 서로의 삶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너무나 다른 삶의 배경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셋 모두 '청년'이라는 것이다. 벤은 기껏해야 종수와 해미보다 6살 밖에 많지 않다. 영화는 단순히 '열심히' 또는 '노력'으로 갈릴 수 없는 삶의 간극을 보여준다. 청춘이 청춘을 노리개로, 구경거리로, 나아가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다. 벤과 나이 차이라도 많이 난다면 종수와 해미의 상대적 박탈감은 덜했을까.
종수와 해미의 구체적 삶은 절대 아름답지 않다. 영화는 둘의 삶의 극적인 반전을 쥐똥 만큼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깔아 둔 희망의 복선을 깔아뭉개는 것으로 구제 불가능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종수는 고향 집에 돌아온 뒤로 계속해서 아무 말도 않는 전화를 받는다. 이는 관객들에게 집 나간 엄마일 것이라고 상상하게 만든다. 다행히 전화의 주인공은 엄마가 맞았다. 하지만 엄마는 500만원이 부족해 16년 만에 아들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종수는 아버지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동네 주민들의 탄원을 받는 등 노력한다. 감독은 관객에게 아버지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것이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금의 감형도 받지 못한다. 해미 역시 마찬가지다. 종수가 해미의 가족을 만나러 찾아가지만, 해미의 가족은 종수에게 해미가 카드빚을 갚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 말라고 전해달라 한다. 연락이 안 되는 딸의 소식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연락이 안되는 딸의 소식을 물어볼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는다. 종수와 해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도,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 때문에 해미와 종수는 사랑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종수는 해미의 방에서 관계를 맺으며 방 한구석을 비추는 한 줌의 빛을 본다. 그리고 이후에도 해미의 방에서 빛을 바라보며 자위행위를 한다. 나는 이 장면이 종수가 해미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삶의 변화가 시작됐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삶이 해미를 만나며 빛을 얻은 것이다. 그 순간 '살아 있음'을 느낀 종수가 남성으로서 '살아 있음'을 계속해서 느끼기 위해 자위행위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해미 역시 삶의 절벽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종수를 만난다. 벤의 말에 비추어 보아 해미는 돈이 하나도 없었고, 해미 가족의 말에 비추어 보아 카드빚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릴적 우물 속에 빠져 있던 자신을 구해준 그 얼굴, 바로 종수는 해미에게 삶의 구원자 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해미가 벤과 만나면서도 계속해서 종수를 불러내는 이유는 종수만이 자신을 이해해주고 존재 자체로서 바라봐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믿음이 종수의 "그런 것은 창녀나 하는 짓이야"의 한마디에 깨져 버린 것이다. 이후 해미가 자살을 했는지, 벤에게 살해 당했는지는 열린 결말로 놔두어도 좋을 것 같다.
종수는 해미에게 상처 준 말을 한 뒤, 해미가 사라지자 자신이 해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종수는 해미를 찾는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비닐하우스를 지키러 뛰어다닌다. 나는 이 부분에서 비닐하우스가 종수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고 생각한다. 벤에게 해미를 빼앗긴 뒤, 비닐하우스마저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종수를 강하게 짓눌렀던 것 같다. 그래서 종수는 매일같이 비닐하우스 사이사이를 달린다. 종수는 아버지를 빼닮아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강한 자존심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에 대한 강한 집착을 만들었다.
반면 벤에게 비닐하우스는 해미와 같은 여성들을 일컫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진짜 비닐하우스를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벤에게 비닐하우스는 "언제든 타들어가길 기다리는, 세상에서 관심 갖지 않는, 필요 없는 존재. 심지어 경찰마저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존재" 였으니 말이다. 만약 해미가 자살을 했다면 이 부분은 '언제든 소멸하기를 원하는 존재인 해미'와 '이를 촉발시켜주는 라이터 같은 존재 벤'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대로 해미가 살해 당했다면 이 부분은 '죽여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버려진 존재인 해미'와 '이들을 언제든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벤'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자면 영화는 벤이 해미를 죽였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만든다. 벤이 말하는 비닐하우스가 해미를 비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왠지 시체를 숨겼을 것 같은 저수지를 벤은 혼자 들리고, 벤의 화장실에 해미의 것으로 추정되는(종수가 준) 분홍색 시계가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또 벤은 원래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는데 해미가 사라진 뒤에 갑자기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다. '보일' 소리에 종수의 품에 안기는 고양이의 모습은 벤의 해미 살해설을 강하게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분홍색 시계는 해미와 같이 일한 여성의 팔에도 둘러져 있고, 벤의 비닐하우스 불태우기 취미와 저수지 들린 것 등은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 나오지 않는다. 고양이 역시 우연의 일치 인지도 모른다. 벤이 해미를 죽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 영화가 종수가 한 명의 성인이 되어가는 성장기의 특징도 갖는다고 생각한다. 종수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공간(소파)을 차지하고, 아버지의 트럭을 차지하고, 나아가 아버지의 무기(사냥칼(?))까지 취득하는 과정은 한 명의 성인으로서 우뚝서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아버지가 평생을 집착한 축산업의 마지막 상징인 송아지마저 종수가 제 힘으로 팔아버리니 말이다. 그리고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서 알 수가 없다"던 종수는 "이제 답을 알았다"며 모종의 확신을 얻게 된다.
그렇게 종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른이 된다. 해미를 빼앗기며 느낀 자존심의 상처는 아버지의 완고한 자존심이 종수에게도 발현되는 기폭제가 된다. 분노조절장애도 영화 말미에 종수에게서 드러난다. 종수는 차, 집, 무기를 갖는 물리적인 성인이 되지만 정신적인 성인은 되지 못한다. 갈등을 폭력으로 밖에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감독은 종수를 통해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한 우리 모두를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진실에는 관심 없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모습만 보면서, 오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네 모습 말이다. 종수의 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공무원을 폭행하고 상해를 하는 모습 역시 영락없는 어른이 되지 못한 일부 성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이 모든 것들이 아우러져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쉽게 말해 이것이 아닐까?
"양극화가 계속 되다 보면 갈등은 결국 폭력을 불러올 것이다"
영화에서 벤이 해미를 헤쳤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벤이 해미를 헤쳤는지는 본질이 아니다. 해미가 거짓말을 했는지, 우물이 있었는지 여부 역시 본질이 아니다. 진실은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문제는 종수가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고, 또 벤을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은 해소되는 순간 확신이 된다. 결국 종수의 본노는 벤에게서 폭발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그가 게으르거나 가난할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부자는 자신의 노력으로만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회가 이를 재조정하지 않고 가만히 놔둔다면 누군가에게는 유희로, 누군가에게는 분노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해는 진실을 가리고, 분노는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불평등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은 사랑, 가족, 자존심, 나아가 개인의 삶까지 파괴한다. 이를 가만히 놔두면 모두의 파멸을 이끌 것이 분명하다. 벤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심장이 '바운스' 뛰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종수에 대해 써주셨네요. 정성글에는 추천이라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버닝 정말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