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a 번역] Discours Figure
Jean-Francois Lyotard, Discours Figure, Paris, Klincksieck, 2017.
형상의 진영
끌로델 같이 “듣는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읽을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옛것과 대립하는 “두 번째 논리”는 말들의 본성과 기능을 결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집합하기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의 눈앞에 자연 그 자체로써 조합한다. ”, “앎이 있고, 하나에서부터 다른 하나 [부분]까지의 의무”, 연결 그러니까 하나의 읽을 수 있는 문구를 형성할 수 있기 위한 담론들에 대하여 그것들의 사이처럼 세계의 다른 부분들 사이의 연결이 있다.
이 책은 주장한다: 수여된 것은 텍스트가 아니며, 거기에는 어떤 두께 혹은 차라리 구성적인 어떤 차이가 읽을 수는 없지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드러내는 이러한 차이, 그리고 부동의 가동성은 그것을 의미하기에서 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슈젠지에서 니코에 오른 것처럼 나는 옛날 일본에서 아무리 먼 배열된 것이라 해도 내 눈의 정렬을 통해서 소나무로 로 제시된 일치를 풍성하게 하는 단풍나무의 초목을 본다. 지금의 페이지들은 숲으로 덮인 이 텍스트를 해설한다. ”
지각보다 더 멀리 가지 않으며 : 눈이 “시점”을 발견했을 때, 나의 시선은 사물들이 응당한 것들일 때에만 말하는 텍스트인가? 텍스트는 감각적으로 깊지 않으며 당신은 그 앞에서 그 안에서 거기에서 승인이 메워지도록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리 했다면 그것은 은유를 통해서다. 그때 지각능력이 있는 것, 삼림의 세계는 단지 모든 유동대리물(類同代理物)의 절대적인 전체 집합처럼 보이기만 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조형의 받쳐진 타블로의 공간을 구성하면서 눈, 머리, 신체가 이동되고 젖어 들고 수은의 큰 통 안에서 같이 가지고 있는 펼쳐진 구성을 모색하면서 움직인다. 그것은 윤곽에 대해서 음색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서 위치에 대해서 완전하기 때문에 가득 메우는, 일순간 성숙한 욕망인 승인으로서 소나무를 승인하는 눈의 정렬이다. 눈의 정렬, 끌로델은 소나무와 단풍나무의 정렬을 말하지 않는다. 이 두 나무들은 “완전하게 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줄기는 그것들을 꿰고 우리가 어떤 바닥인지 어떤 직물인지 알지 못함에 대해서 그것들을 조화롭게 한다. p.9